흔하디 흔한 판타지이지만 <농부>에는 뭔가 특별한 것 이 있다. 여기에는 전쟁도 나오지 않고 대규모 영토전쟁, 악랄한 영주, 궁중세계의 암투와 검기를 풀풀 날리는 용사들의 싸움조차 나오지 않는다. 심지어 주인공인 네르크는 처음부터 끝까지 칼 한번 잡지 않고 눈싸움 한번 하는 적이 없다. 그럼에도 <농부>는 재미있으며, 작가가 처음부터 밀고나간 주제를 뚝심있게 전달한다. 전개 도중 방향타를 잃고 우왕자왕하는 소위 '양판소'가 범람하는 이 바닥에서 나름 진지한 주제를 초지일관 밀고 나간 점은 칭찬할 만 하다. 물론 중2병 스러운 설정들이 과하게 담겨 있고, 문체가 경박한 점은 간혹 눈살을 찌뿌릴 수도 있겠지만, 이 소설이 인터넷 연재작인 점. 당시 작가의 나이 등을 감안한다면 가볍게 넘어가 줄 수준이다.
주인공 네르크는 농부다. 그냥 농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숨어사는 재야의 고수도 아니다. 마법도, 검술도 할 수 없지만, 뛰어난 관찰력과 연구로 수 종의 특작물들을 재배하는 특이한 농부다. 예를 들면 전설의 식물 만드라고라를 재배해서 납품한다던지, 와이번을 키우고 블링크 독 같은 환상 속 몬스터들을 가축화하기도 한다. 마계의 식물들을 재배하거나 트롤을 개량해서 농사짓는 가축으로 만드는 일까지도 한다. 그런 네르크가 몰락 귀족인 라나를 사들인다. 이 부분의 설정은 빈약하기 짝이 없으나 그냥 한눈에 반한 것으로 알고 넘어가자. 아무튼 라나는 네르크와 함께 농사일에 빠져 들고 네르크와 미묘한 관계를 형성한다. 귀족 출신으로 보이는 네르크라는 남자의 숨겨진 과거는 무엇인가.
사실 네르크는 몰락 왕족인 다크우드의 후손이다. 다크우드 영토의 왕인 네르크의 아버지는 자기의 친딸(네르크의 누나)를 건드릴 정도의 막장 폭군이었고 이에 제국의 용사들에 의해 멸망한 것. 당시 네르크는 자신이 왕이 될 때까지만 약속을 하였으나 대륙 최고의 용사 카이젠이 이를 어기고 다크우드를 멸망 시킨 것이다. 후계가 없던 카이젠이 네르크를 후계자로 삼고자 하였으나 약속을 어긴 카이젠에 실망한 네르크는 평범한 농부로 살고자 한 것이다. 네르크는 다크우드의 영토에 있던 농부 라이넨과 교류하면서 그의 직업정신에 깊은 감명을 받았었는데 카이젠의 공격시 라이넨이 사망한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작품 전체를 통틀어 "우수밀 대회" 정도가 가장 큰 사건일 정도로 평온한 소설이지만, 네르크의 유쾌한 친구들이 지루함을 많이 줄여준다. 이 책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메세지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이 소설 내내 강렬하게 전달되며 그것이 약간의 개그스러움과 소소한 이벤트로 포장되어 있다.
"왕의 자부심을 가지고 일하는 자. 바로 왕인 셈이지"
특히나 작가는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로 보고 있는데 그것이 농부라는 직업을 소재로 삼은 이유이기도 하다. 왕이나 용사, 기사 같은 판타지의 주인공들이 아닌 평범한 농부를 주인공으로 하고 그 주변 인물들의 조합을 통해 재미를 불어 넣는데 성공했다. 뛰어난 검사인 맥스나 고기만 먹는 엘프 쇼, 천방지축 네크로맨서인 하렌 등이 동료를 이루고 있다. 그 외에도 성 안의 개성있는 주민들도 요소요소 잘 배치되어 있는 편이다.
"난 그것을 타파하기 위해 농부란 직업을 선택한거야. 직업엔 귀천이 없어야 해. 사람들은 적어도 왕이 될 건가요, 아니면 농부가 될 건가요. 라고 물으면 전 저의 적성에 맞는 직업을 선택하겠어요 라고 말할 수 있어야지."
인간들을 이렇게까지 움직이고 있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자부심. 이것은 모든것으로 연결 될 수 있다. 꿈이니 용기니 하는 이런 화려한 단어들조차도 그것에는 상대가 되지 못한다.
피튀기는 용사의 이야기를 배재하고라도 이런 작품을 전개했다는 점은 높이 살 수 있으며 D&D룰이 아닌 자신만의 작은 세계관과 소재들을 창조한 점도 눈여겨 볼 만 하다. 꽤 오래 전 나온 작품이면서도 현재까지 읽히는데에는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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