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수레의 책읽기

[그레이브 디거] 일본에서 되살아난 마녀사냥의 망령

슬슬살살 2014. 12. 7. 20:03

악당으로만 살아온 야가미는 골수 이식을 하루 앞두고 있다. 이번 이식은 단순한 선행이 아니라, 어둠속에서 살아온 야가미를 다시 태어나게 할 것이다. 이식 하루 전날 돈을 빌리기 위해 방문한 친구의 집에서 친구의 시체를 발견한 이후 의문의 집단이 야가미를 뒤쫒는다.

 

평범한 악당 야가미의 하루를 그려낸 작품이다. 총 400여 페이지로, 소설 속에서의 시간 흐름과 읽는 시간이 거의 동일하게 흐른다. 이런 구성에서의 관건은 속도다. 활자에서 활자로 이어지는 속도감이 조금이라도 지체되면 지루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초반부터 끝까지 한틈의 쉼도 허용하지 않는다. 일단 알 수 없는 집단과 야가미의 추격전이 긴장감 넘치는데다 경찰까지 이 추격에 동참하면서 속도는 배가 된다.

 

야가미의 친구인 시마나카는 욕조에서 죽었다. 양 엄지손가락을 교차한 엄지발가락에 묶인 채였으며 뜨거운 물로 삶아져 있었다. 몸의 한쪽에는 X모양의 흉터가 새겨져 있다. 그 이후로 동일한 모양의 시체가 한 구 더 발견 되면서 야가미는 연쇄살인의 용의자가 되어 쫒긴다.

  

연쇄살인의 누명을 쓴 주인공이 쫒기는 건 흔한 설정이지만 그 시체와 피해자들의 정체가 문제다. 피해자들은 어떠한 연결고리도 가지고 있지 않다. 시체들은 중세 유럽의 마녀사냥에서의 고문방법을 따라 죽었다. 보이지 않는 불에 타서 죽은 시체가 나오면서 이 책의 제목인 <그레이브 디거>가 수면 위로 등장한다. '무덤을 파는 자'라는 뜻의 그레이브 디거는 영국에서 시작된 말이다. 중세 마녀사냥의 광풍이 전 유럽을 휩쓸 때 영국만큼은 그 피해가 적었다. 무덤에서 살아난 마녀, 그레이브 디거가 이단심판관들을 마녀사냥의 형태로 죽였다는 전설 때문인데, 교토의 한 복판에서 그 전설이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단순한 추리 스릴러물일 수도 있지만 <그레이브 디거>는 일본 수사체계의 허점을 정면으로 들이받는다. 우리나라의 경찰-검찰이 수사권과 기소권을 사이에 두고 갈등하는 것처럼 일본은 보안부와 수사부가 늘 대립하고 있는데 카즈야키는 이러한 점을 소설속의 중요한 갈등구조로 삼고 있다.

 

중반에 이르러 피해자들의 정체가 하나 둘 드러난다. 그들의 연관관계는 두가지이다. 하나는 도너(골수기증자) 등록이 되어 있는 이들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몇개월 전 있었던 살인사건의 목격자들이라는 것이다. 골수 기증과 살인사건의 목격자, 어떤 연관 관계가 있는 것일까.

처음에 읽는 이들은 누군가 골수기증을 받는 사람을 죽이려 하는게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 그러나 뿌려진 떡밥들이 회수되는 모습을 지켜 보면서도 진실에 접근하기가 여간 어려운게 아니다. 다카노는 영리한 작가다. 떡밥을 뿌리는 것과 회수하는 것, 모든 정보를 열어 놓지만, 끝까지 독자가 진실을 알지 못하게 연막을 친다. 우연과 필연을 동시다발적으로 섞어 놓는 특유의 작전을 기가막히게 쓴다는 느낌이 드는데 이 장점은 후에 <제노사이드>에서 완전히 꽃피운다. 야마기가 과거 저질렀던 사기 경험이 막판 문제 해결의 결정적 역할을 한다던지, 백혈병에서의 일치 관계 같은 우연 요소가 상당함에도 사건이 논리적인 개연성을 가진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건 확실히 다카노만의 재주다.

 

백혈병에 걸린 정치인, 도모토 겐고가 있다. 이 정치인의 골수이식을 위해 사조직 일당이 모두 도너 등록을 하게 된다. 이 사조직은 과거 도모토 겐고의 정적의 아들이 살인용의자가 되었을 때 거짓 증언을 한 적이 있다. 당시 곤도라는 인물이 죽었었는데 그의 도움을 받았던 미네기시가 골수의식 코디네이터가 되어 도모토 겐고와 그의 조직에 복수를 시작했고, 그 와중에 야마기의 골수가 끼어든 것이다. 야마기의 골수가 도모토와 일치하는 것이 핵심. 예전 야마기가 도모토와 비슷한 목소리로 사기를 친 적이 있는 걸 보면 야마기와 도모토의 관계가 먼 친척쯤 되는지도 모르겠다. 

 

다카노 가즈야키는 언제나 독자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게다가 그레이브 디거의 전설 자체가 작가가 만들어낸 허구라는 사실은 실망은 커녕 실소를 짓게 만든다. 악당일 수밖에 없는 야가미를 응원하게 만드는 것도 그렇고 역시나 다카노는 천부적인 이야기꾼이다.

 

 


그레이브 디거

저자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출판사
황금가지 | 2007-06-29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험악한 인상 때문에 평생 범죄의 그늘에서 살아온 야가미. 새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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