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를 읽을 때 느꼈던 섬뜩함을 잊지 못한다. <매트릭스>나 <아일랜드>같은 SF 영화에서도 미슷한 공포를 느낀다. 외계인이나 기묘한 모습의 적이 무서운게 아니다. 자유의지의 통제. 개인이 아닌 사회 자체가 스스로를 통제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공포스러웠다. 이런 공포를 던지는 디스토피아 작품들이 시대를 초월한 인기를 얻는 건 산업 발전의 이면을 두려워 하는 이가 늘 존재하기 때문이다. <멋진 신세계>는 이런 디스토피아 문학 중에서도 고전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이다.
작품의 배경은 정확히 알 수 없는 먼 미래다. 인류는 발전에 발전을 거듭 해 모든 질병을 정복했고, 더이상 일하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사회를 건설했다. 그 과정 속에 효율과 안정, 행복이 가장 중요한 가치로 자리잡으면서 이 사회는 많은 인간적인 요소를 포기했다. 극단적인 예로 이 사회는 더이상 아이를 낳지 않는다. 인공부화장에서 필요한 숫자만큼이 배양되며 관리되고 생산된다. 이 모든 것이 '포드'시스템이다. 더불어 이 사회를 지탱하는 일종의 신의 이름도 대량생산의 아버지인 '포드'와 같다.
생산된 아이들은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삶을 살아간다. 개인적인 예술가나 백수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라에서 정해준 일들을 하게 되며 계급에 따라 아이를 배양하거나, 소마를 제작하는 일을 하게 될 수도 있고 운전을 하거나 쓰레기 처리하는 일을 할 수도 있다. 가장 상위계급조차 스스로의 자유는 가지고 있지 않다. 인간은 4단계의 계급으로 나뉘어 태어나며 개성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똑같은 쌍둥이가 60여명 존재할 수도 있다. 각 계급의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정신적인 주입식 교육을 받는다. 그렇게 계급에 대한 불만도 없고 일에 대한 불만도 없는 인간으로 만들어져 사회를 위해 소모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베타 계급의 운전사가 한명 필요 하다고 한다면 그 아이를 생산해서 어렸을 때부터 운전을 좋아하도록 만드는 식이다. 그 대가로 얻은 것은 병도 없고 늙지도 않는 건강, 먹을 것이 떨어지지 않으며 자유로운 섹스를 만끽할 수 있는 삶 등이다. 고통도 없고, 힘들여서 무얼 할 필요도 없다. '공유, 균등, 안정'이 이 사회의 슬로건이다. 이 사회는 인간의 모든 고통을 없애는데 성공하기는 했다. 그 원인까지 포함해서...
인간의 고통은 어디에서 올까. 인간은 사랑 때문에 고통스러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은 사랑이라는 개념이 없다. 결혼도 없으며, 아이를 낳지 않기 때문에 가족에 대한 애정도 없다. 자유로운 섹스가 장려되어 강간도 없고, 소유에 대한 욕망이나 질투도 존재하지 않는다. 직장과 먹을 것, 의복이 모두 공통적으로 지급되기 때문에 이에 대한 고통도 없다. 개성을 억제 하기 위한 다양한 장치들이 개발되어 남들과 다르고자 하는 욕구 자체를 없앤다. 그 때문에 문학과 예술이 사라지긴 했지만 행복과 안정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종교적인 열망, 억제된 스트레스는 안정화된 마약 '소마'로 풀 수 있다.
이 사회에 균열이 생긴건 '버나드' 때문이다. 버나드는 원주민 보호구역에서 존을 데려오는데 존은 우연찮게 원주민 구역에서 살게 된 문명인 '린다'의 자녀다. 아이를 낳는다는 개념이 없는 문명국에서 존은 이상한 생물 취급을 받고, 존은 문명에 대해 적응할 수가 없다. 문학을 가르치지 않고, 몰개성한 문명인들에게 환멸을 느낀 존은 외딴 곳에서 살아가려 하지만 사회는 그를 놓아두지 않는다. 문명인의 혈통이라는 이유로 원주민에게도 배척받은 존은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고 목을 매단다.
"하지만 저는 안락을 원치 않습니다. 저는 신을 원합니다. 시와 진정한 위험과 자유와 선을 원합니다. 저는 죄를 원합니다."
"그러니까 자네는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고 있군 그래"
"그렇게 말씀하셔도 좋습니다." 야만인은 반항적으로 말했다.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합니다."
"그렇다면 말할 것도 없이 나이를 먹어 추해지는 권리, 매독과 암에 걸릴 권리, 먹을 것이 떨어지는 권리, 이가 들끓을 권리,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끊임 없이 불안에 떨 권리, 장티푸스에 걸릴 권리, 온갖 표현할 수 없는 고민에 시달릴 권리도 요구하겠지?
긴 침묵이 흘렀다.
"저는 그 모든 것을 요구합니다."
다시 야생으로 돌아간 존은 행복했을까.
그렇지 않다. 존은 자신을 집요하게 찾는 문명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고 자살로 비극적인 삶을 마감한다. <멋진 신세계>는 산업화, 획일화를 풍자하는 디스토피아 소설이긴 하지만 비문명이 옳다고도 하지 않는다. 이미 발달한 과학과 진보는 어떤 방식으로든 인류를 불행하게 만든다는게 헉슬리의 견해였다. 헉슬리는 포드식의 산업혁명과 프로이트의 정신 혁명 양 갈래를 배경 삼아 자신만의 디스토피아를 건설한다. 그런점에서 헉슬리는 지독한 회귀주의자이자 염세주의자였다. 존은 그래서 죽어야만 했다.
지금의 눈으로 보자면 헉슬리의 예측은 틀렸다. 그 어떤 과학과 기술의 진보도 인류의 자유를 빼앗고 있지는 않다. 그렇지만 완전한 자유를 보장하지도 않는다. 헉슬리가 예측한 방식대로는 아니지만 기술의 발전때문에 고통받는 이가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멋진 신세계>같은 디스토피아 소설에서의 고민과 성찰이 우리가 기술을 받아 들일 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다시 보면 고통없는 행복은 존재하지 않는다. 기술이 모든 고통을 덜어낸다면 행복은 무엇으로 찾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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