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을 봤다.
1700만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수립한 명량은 영화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한국 영화사에 깊은 족적을 남겼다. 한국인의 1/3이 본 영화라. 대단하다.
늦은 시점에 집에서 본지라 극장에서의 느낌과는 사뭇 다르지만 전체적으로는 실망에 가깝다. 물론 영화의 절반 이상을 할애하는 해상전투씬을 자그마한 화면으로 보니 재미가 반감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아쉬움의 골자는 그런 것이 아니다.
최민식의 연기력과 관련한 수많은 찬사를 부인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최민식이라는 배우가 연기한 이순신은 이전작들에 비해 강한 임팩트을 주지 못한다. 물론 그가 연기한 이순신이 역대급임은 확실하나 영화가 전달하는 메세지에서 최민식이 보여주는 강렬함은 결코 <올드보이>를 뛰어넘지 못한다. 워낙 전투씬에 높은 비중을 두다보니 한정된 러닝타임 안에 이순신이라는 인물의 복잡 미묘한 감정을 담기에는 무리였다는 생각이 든다. 병약하면서 고집스럽고, 인간적인 고뇌와 강한 스트레스, 한치의 결점도 용납하지 않는 완벽주의 뒤에 있는 아버지 이순신까지를 두권이라는 짧은 글 안에 녹여낸 최훈의<칼의 노래>에 비한다면 더더욱. 물론 인간을 뛰어넘는 한 영웅을 2시간안에 녹여내기란 쉽지 않을 작업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영화의 비중은 이순신이 아니라 충무공이 치렀던 한 개의 대형 전투에 치우쳐 있음은 감안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이후 한산, 노량이 기획되고 있다 한다. 최민식이 고사하기는 했지만 이 프로젝트가 실제로 진행 된다면 해상 전투 외의 이순신을 봤으면 한다. 한 명의 관객으로서, 인간 이순신이 궁금하다.
이순신 만큼이나 강력했던 건 오리지널 캐릭터인 임준영(진구)와 그의 벙어리 부인(이정현)이다. 특히나 오랜만에 스크린에 선 이정현의 광기어린 연기는 20년 전 <꽃잎>을 떠올리게 했다. 반갑다. 수많은 조연들 사이에서 진구와 이정현은 그야말로 비중을 차지했다. 남편이 죽을 줄 알면서 치마를 벗어 흔드는 벙어리 여인은 한국영화가 아니면 도저히 연출할 수 없는 장면이다.
영화를 보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전투의 재현이다. 상당한 고증을 통해 재현한 해상전투씬은 가장 큰 스포일러인 국사책을 훌쩍 뛰어넘는다. 12척의 배와 선원, 장수가 대동단결한 것이 아니라 고작 한척의 대장선이 대다수의 싸움을 주도하고 심지어 승리까지 얻는 장면에서 장수 이순신의 위대함을 여과 없이 볼 수 있다. 거북선이 없는 판옥선 조차도 일본의 조악한 배들에 비해 강력했던 데다, 각종 화포와 무기에서 일본을 앞서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모르고 있다. 조금만 조사를 해봐도 당시 조선 수군의 수준은 전 세계를 통틀어서도 가장 강력한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칠천량 등에서의 패전은 정말이지 위정자들의 나태함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잘 보여준다.
고증과 관련한 논란이 좀 있다. 원래 역사물의 고증논란은 늘 있는데, 여기에 아마추어 밀리터리 매니아들까지 합세해 판이 커졌다. 개인적으로는 세세한 고증이 뭐가 중요한가 생각한다. 우린 다큐멘터리를 보는게 아니다. 큰틀에서의 고증(대장선의 선전으로 인한 불가능한 전투에서의 승리)을 기반으로 역사에 없던 백병전이야 영화적 카타르시스로 만족하면 안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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