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에 얽힌 가상의 역사를 스크린 위로 올린 작품이다. <도둑들>에 이은 최동훈 감독의 떼거지 주연 스타일의 영화다. 도둑들에서도 느꼈지만 최동훈 감독은 정말 다양한 캐릭터를 영화 안에 녹여내는데 있어서는 천재인 듯 하다. 괜히 충무로를 뜨겁게 달구는게 아니다. 한 번 천만을 뚫는 것도 힘든데 무려 두번이나 달성한 '쌍천만'이라니. 게다가 19세 이상가였던 타짜의 500만까지 감안하면 가히 흥행의 귀재라 할 만하다. 배우빨이라는 혹평도 없는 건 아니지만, 송강호, 최민식의 경우도 천만관객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최동훈 감독의 작품은 재미에 충실하다. 흰 도화지를 캐릭터로 꽉 채워놓고 간혹 보이는 여백에 칠해 놓은 유머가 도드라지는 스타일. 한국에만 국한되지 않고 세계 어디서든 통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어낸다. <암살>만 하더라도 스타일은 <도둑들>의 연장선이되 무게감 있는 역사관, 스타일리쉬한 연출이 관객을 꽁꽁 묶어둔다. 간혹 대사 하나라도 놓치면 얼마나 짜증나던지. 도무지 관객에게 휴식을 허락하지 않는 빽빽한 연출이다.
백범 김구가 이끄는 독립군에 소속된 암살단원들이 조선주둔군 사령관 카와구치 마모루와 매국노 강인국을 노린다. 저격수 안옥윤(전지현), 김구의 오른팔이자 과거 강인국 암살에 실패했던 염석진(이정재)를 중심으로 신흥무관학교 출신의 속사포(조진웅), 그리고 폭약 전문가 황덕삼(최덕문)으로 암살단이 꾸려져 경성으로 향하고 그 과정에서 살인청부업자인 하와이 피스톨(하정우)와 얽히게 된다.
큰 틀에서의 시나리오는 다양한 인물들이 벌이는 암살 합동작전으로 <도둑들>의 흐름과 다를바 없다. 최동훈 감독은 개별 캐릭터에 얽힌 가지 이야기들을 집어 넣어 영화를 더욱 입체감 있고 생동감 있게 만들어냈다. 다양한 캐릭터를 한군데 넣으면서 산만하지 않게 만드는 작업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어벤저스>나 <잰틀맨 리그> 같은 작품들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된다. 조금만 균형감각을 놓치면 순간적으로 캐릭터가 사라져 버리거나 이야기가 산으로 가게 되는데 최동훈 감독의 연출은 힘있는 메인 스트림을 해치지 않으면서 곁가지를 풍성하게 구축한다.
먼저, 안옥윤부터. 친일파 강인국의 쌍둥이 딸로 독립운동을 후원하던 어머니가 강인국으로 도망칠 때 가까스로 살아남아 만주에서 키워진다. 다른 쌍둥이 형제는 강인국 곁에서 공주님처럼 키워져 카와구치와 정략 결혼을 하게 되는데 훗날 안옥윤으로 오해한 강인국에게 살해된다. 신파극으로 흐를 수 있을 법한 출생의 비밀 소재지만 질질 끌지 않고 다룬 덕택에 매끈한 스토리라인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전지현의 1인 2역 연기와 미모가 빛났던 케이스. 영화를 보다보면 왜 전지현이 세기의 미녀인지 부득불 깨닫게 되는데 연기까지 잘하니 안예쁠수가 없다.
수많은 명장면 중에서도 이 장면이 가장 압도적이었다. 어쩌면 죽을수도 있을 암살행 직전 찍는 기념 사진이 쑥스러운듯, 내심 예쁘게 나오길 바라는 안옥윤의 감정이 미묘하다. 독립운동가도 평범한 사람이다라는 당연한 진실을 이 한장면이 품고 있다.
가장 흥미로운 인물이 염석진이다. <신세계>때에도 스파이 노릇을 하더니 <암살>에서는 스파이 전문 배우로 정점을 찍는다.
몰랐으니까.. 내가.. 내가.. 조선이 독립될 줄 몰랐으니까.. 알았으면 했겠어!!
해방 직후 대다수의 친일파들이 같은 이유로 면죄부를 요청했으며 실제로 벌을 받지 않은데에도 저 요소가 많이 개입되었다. 영화가 가지고 있는 주제를 정확하게 꿰뚫는 단 하나의 대사가 이정재의 입을 통해 나오면서 큰 울림을 가지게 됐다. 게다가 염석진의 변절 스토리도 강렬하다. 원래 열혈 독립투사였던 염석진은 강인국 암살에 실패하고 동료들의 죽음 앞에서 변절한다. 원래 변절한 사람이 더 무서운 법. 빨갱이 노이로제에 걸려 있는 보수파 대다수가 과거 유신 시절 학생운동 선봉에 섰던 이들인것 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또한 이 대사는 앞을 볼 수 없었던 상황에서도 끝까지 독립운동을 해 온 독립운동가에 보내는 찬사이기도 하다.
하와이 피스톨은 친일파 아버지를 둔 아들로 아버지를 서로 바꿔 암살하려던 집단 살부계 소속이다. 친부 암살에 실패하고 살인청부업자로 살아가던 또다른 시대의 사생아. 임옥윤에게 연민과 애정을 느끼고 암살을 돕지만 최후의 순간 염석진에게 죽는다.
그 외에 조연급으로 나오는 인물도 하나같이 강렬한 한방을 가지고 있다. 염석진에게 총을 넘겨주며 의중을 떠보는 김구, 나만 매국했냐며 스스로를 정당화시키는 강인국, 아무렇지도 않게 조선 소녀를 쏘아죽이는 카와구치, 끝까지 의기를 잃지 않은 채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들이대는 마담 김해숙까지. 모두 소름끼치는 포인트로 물리적인 시간을 초월한 분량을 뽑아낸다.
상업 영화로서의 재미를 유지하면서도 시대의 아픔과 독립운동의 고난을 그려낸 <암살>의 백미는 마지막 염석진의 재판장면이다. 내가 뭘 잘못했냐며 웃통을 벗고 항변하는 염석진과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하고는 의사봉을 던져버리는 재판부. 그를 맞이하는 경찰들까지 짧은 장면 속에 우리 시대가 아직 풀지 못한 숙제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배우의 백미 또한 이 장면 속에 있으니 웃통을 벗어재낀 이정재의 몸이다. 노구의 연기를 해야했던 이정재의 늘어진 가죽과 뱃살, 검버섯에서 우리는 이정재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한 순간에 알 수 있다. 원톱으로서 극을 끌고가는 힘을 보여준 적은 없지만 적어도 투톱 체제에서의 이정재가 얼마나 강렬한지. <관상>, <도둑들>, <신세계>에서의 이정재는 배우의 전성기를 뽐내는 모습이다.
그야말로 <암살>은 천만영화란게 무엇인지 진가를 보여준 영화다. 이제 최동훈이라는 이름은 영화 선택의 브랜드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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