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와 돌연변이, 방사능과 기후, 식량난, 원자폭탄과 외계인. 인류의 멸망, 혹은 아포칼립스는 이러한 것들에서 나온다. <해프닝>도 이런 면에서는 일반적인 인류멸망 영화와 비슷한 루트를 밟아 나간다. 무언가가 나타나 인류를 위협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결말만 좀 다른데 인류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위협이 사라진다. 그야말로 한 번의 해프닝처럼.
해프닝에서 인류를 위협하는 건 식물이다. 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식물들이 인류를 위협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인류에게 무언가 알수 없는 기운(?)을 보내서 스스로 자살을 택하게 만든다. 그 어떤 무기도 저항도 소용 없고 면역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바람이 한차례 불고 식물들이 소곤대고 나면 몰살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고등학교 수학 선생이던 앨리엇이 일종의 규칙을 발견해 낸다. 그건 큰 집단에서 작은 집단으로 공격 목표가 이동한다는 것이다. 쉽게 얘기하면 두 집단이 있을 때 큰 집단이 몰살당한다는 뜻이다. 인류가 모조리 흩어져 1명이 되는 순간이 올 때는 어떻게 될런지...
여러 형태의 소설과 영화를 봐 왔지만 무척이나 독특하다. 액션 한장면 없이 끔찍한 공포를 차갑게 표현했다. 소설 <폐허>도 식물이 인간을 공격한다는 설정을 가지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폐허>는 선혈이 낭자한 고어물이고 <해프닝>은 끝까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스테리라는 정도다. 전자쪽이 압도적인 공포를 준다면 <해프닝>은 포기와 무기력함을 선사한다. 식물이 인류의 정신을 지배해서 자살하게 만드는데 어떤 반격이 있을 수 있을까.
마지막 통나무집에서 2명과 1명으로 나뉘어 죽음을 기다리다, 함께 죽기로 결심하는 장면 정도가 인류의 유일한 반항이다. 도망치다 죽느니 사랑하는 이와 마지막을 함께 하련다라는 무척이나 원시적인 주제가 인간의 마지막 자존심일 뿐이다.
영화는 이 일의 원인과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미국의 북동부에서만 일어났다는 점에서 정부의 어떤 실험이라는 음모론이 있지만 말 그대로 음모론일 뿐이다. 게다가 마지막 장면에서 똑같은 일이 재발하는 걸 보면 식물의 반란이라는 해석이 더 합리적이다. 모르긴 몰라도 인류는 멸망했을꺼다. 그것도 엄청나게 무기력함을 맛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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