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삼매경

[엑시트] 더하거나 뺄 것 없이 깔끔한 재난 코메디

슬슬살살 2020. 2. 25. 21:10

확실히 한국 영화 수준이 올라갔다. 한국에서 코메디물은 꽤 안전한 방식의 제작으로 여겨졌다. 상대적으로 낮은 제작비와 웃기기만 하면 어느정도는 용서가 되는 장르의 특성상 망해도 적게 망하고 터지면 꽤 짭잘한 관계로 높고 낮은 다양한 코메디의 시도가 있었다. 그러다가 작년, <극한직업>이 초대박을 터트리면서 이제 잭팟까지 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엄밀하게 따지면 <엑시트>는 재난물이지만, 거의 5분에 한번 꼴로 시도 되는 개그요소는 이 영화를 코메디물로 분류하게 만든다.


화학 회사에서 해고된 누군가가 회사에 복수하기 위해 유독가스를 터트리고 자살한다. 이 가스는 조금만 흡입해도 신경에 문제가 생기는 최고 수준의 극독물. 공기중에 가라앉는 물질 특성으로 시간이 갈 수록 촘촘하게 도시를 점령해 나간다. 이로 인해 고립된 가족을 위해 전직 산악부원이자 백수인 용남(조정석)과 파티업체 직원인 의주(윤아)가 나선다.

 


특별한 재난을 극복해 나가면서 옛 사랑을 다시 시작한다는 클리셰는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오래 된 하나의 장르다. 그러나 이걸 코메디로 다룬 건, 아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처음이지 않을까 싶다. 물론 <새벽의 황당한 저주>처럼 패러디에 가까운 영화는 있었지만 실시간으로 사람이 공포스럽게 죽어가는 한 가운데에서, 이토록 오버 없는 웃음을 줄 수 있는 건 <엑시트>뿐이다. 영화의 완성도도 매우 높아서 탈출하면서 벌어지는 장애 하나 하나를 극복할 때마다 심장이 덜컥 거린다. 더욱 마음에 드는 사실은 스토리의 흐름이 매우 빠르고 억지스러운 연출이 없다는 거다. 질질 끌거나 억지로 울리지 않는다. 두 주인공의 과거 인연을 설명하는 회상씬도 짧게 다룬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하다. 영화의 균형에는 조정석이 있다. 강인한 체력과 영웅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지만 현실 찌질이 백수 역할을 하면서 그 흔한 오버 한 번 보여주지 않는다. 배를 긁거나 자다 일어나는 모습, 게임에 빠져 재떨이 가득 담배를 쌓아놓는 모습 대신 조카가 자기를 왜 부끄러워하는 지 모른다거나 대학 때 첫사랑을 잊지 못하고 어거지로 엄마의 환갑잔치를 잡는 모습, 흥에 겨운 가족들을 부끄러워하는 모습은 실 생활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기에 더더욱 자연스러운 웃음을 선사한다. 타고난 운동신경으로 탈출 과정의 다양한 모습을 디테일하게 담아낼 수 있던 것도 영화적 완성도를 높이는데 큰 기여를 했다. 믿고보는 조정석은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 윤아 역시 첫 영화 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가녀린 허리와 손목이 영화와 꼭 맞았다고는 보기 어려울 것 같다. 실제로 윤아의 액션 신들은 뭔가 부족한 느낌을 받는다. 차라리 좀 더 강인한 느낌의 이하니나 이성경 같은 배우가 맡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