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삼매경

[기생충] 계획의 승리

슬슬살살 2020. 3. 25. 21:58

2019년, 한국 영화계를 한 단어로 정리하면 '계획'의 승리다.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라는 대사로 전 세계를 휩쓴 기생충 이야기다. 영화의 리뷰야 워낙에 많이 나왔으니 추가로 감상을 더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이런 날이 또 올까 하는 마음에 가벼운 단상을 남긴다. 이 영화는 심오한 주제를 다루면서 가벼움과 무거움을 경쾌하게 오간다. 가난에도 어두움이 없어 보이는 기택(송강호)의 가족들이 죄의식 없이 한사장(이선균) 가족을 속이고 결국 파국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은 어둡기 그지 없지만 사이사이 채워져 있는 블랙 조크는 한없이 가볍기도 하다. 그 웃음 하나하나가 계획되어진 씁쓸한 웃음이라는데서 봉준호의 위대함이 드러난다. 


이 영화는 빈부격차의 기준을 계획으로 나눈다. 계획을 세워도 지킬수 없는자, 무의미한 계획을 세우는 자는 가난하다. 송상호는 계획적으로 한사장에게 접근하지만 불법적인 이득만 취할 수 있다. 계획이 성공해 한사장의 자산을 축내다가도 무심히 되돌아오는 한사장 앞에서는 바퀴벌레보다도 못한다. 예상치 못한 폭우에 전재산을 날려도 먹고 살기 위해 출근해서 재롱을 떨어야 하는 것도 계획대로 되지 않는 대표적인 예다. 또, 아들 기우는 어떤가. 돈을 벌어서 아비를 구하겠다는 허황된 계획만 세울 뿐이다. 

 


반면, 부를 가지고 있는 자는 계획을 세우지 않아도 모든 것이 평온하고 계획이 틀어져도 큰 타격이 없다. 캠핑을 갔다 폭우로 철수하더라도 돌아오는 수고만 할 뿐 별 타격이 없다. 돌아오면 가정부가 짜파구리를 끓여주고 짐정리를 해 줄테니. 그리고 다음날은 미세먼지 없음에 감사할 뿐이다. 그런데 이 부자들, 악하지 않다. 뒤에서는 기택을 흉볼 지언정, 싫은 소리도 하지 않고 그렇다고 가식을 떨지도, 선하지도 않다. 그냥 무시할 따름이다. 계획 다음으로 중요한 단어. '선'을 지키기만 한다면. 


결과적으로 기택은 열등감과 패배감, 치욕으로 인해 한사장을 살해한다. 한사장이 직접적으로 기택에게 가한 행위가 아무것도 없으면서. 아마 이 부분이 전 세계가 열광한 부분일꺼다. 악과 선을 구분하지 않고 오로지 빈부로만 구분되는 현실 세계. 영화라는 장르의 기본, 원인과 결과의 명확성을 포기하면서도 웬지 이해되는 그 정황들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꺼림찍한 자아를 보여준다. 김기덕의 영화 역시 '꺼림찍한 악'을 다루지만 영화 후에 남는 여운의 끈적임에 차이가 있다. 김기덕 감독은 비뚫어진 세계, 사회의 가장 어두운 면을 옅보게 하는 관음성을 가지고 있다. 아물어 가는 딱정이를 궂이 떼어가며 고통을 즐기는 가학적인 쾌락이다. 봉준호 감독은 훨씬 대중적이다. 대부분의 보편화 된 인간이라면 가지고 있는 생각을 명확한 영상 언어로 그려냈다. 


대부분의 성공하는 영화는 아무래도 출연자가 독보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명량의 최민식이, 변호인의 송강호가, 내부자들의 이병헌이 영화의 성공에 가장 큰 기여를 한다. 그렇지만 이 영화는 봉준호 감독이 절대적이다. 이 영화의 배우들 모두 훌륭한 연기를 펼쳤지만 최고의 연기를 보인 배우는 없다. 이선균은 <끝까지 간다>보다 평범했고 송강호는 <변호인>을 넘지 못한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 훌륭한 배우들이 완전히 힘을 빼고 봉준호라는 거장의 지휘에 완전히 맡긴 모습이다. 때문에 이 영화의 주인공은 감독과 그의 계획일 수 밖에 없다. 충격적이고 매력적이며, 며칠동안 여운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