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 있음)
연쇄살인마의 등장은 진부하면서도 새롭다. 스릴러물에서 연쇄살인마를 다루는 키포인트는 두가지다. '누구'와 '왜'. 여기에 '어떻게'가 들어가면 추리소설로 분류가 되지만 <악의 심연>에서는 '어떻게'를 아주 적은 부분만 다룬다. 그래서 이 소설은 범죄 스릴러이다. 한 편으로는 너무나 자세한 묘사에 인상이 찌뿌려지는 것이 고어물에도 한 발을 담그고 있다고 생각된다. 어쨌거나 이 책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은 공포와 더불어 잔혹함, 그리고 그걸 은근스레 즐기는 가학적 성향의 발견이다. 영화 <호스텔>을 봤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브롤린은 계단을 찾으면서 자신이 악의 심연 속을 헤매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보고 듣고 읽은 모든 것, 즉 범죄를 향해 열려 있는 악의 심연 말이다.
찢겨진 시체들을 찍은 수천 장의 사진, 벌어진 살덩어리를 클로즈업한 사진, 시체의 부검 보고서, 땀구멍 가득 고통이 스며 나오는 역겨운 시체. 범행 현장이나 시체 안치소에 널브러져 있는 내장이 벌어진 고깃겅어리들. 그리고 살인자들이 여자와 아이를 천천히 죽음으로 몰아 가면서 녹음한, 끔찍한 소리를 담은 테이프도 들었다. 때로는 그 괴물들이 찍은 비디오도 보았다. 그 속에서 피해자는 자신이 끔찍한 고통을 받으리라는 것과 죽으리라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가 모두 빠져나가 정신을 잃을 때까지 희망을 버리지 못하리라는 것을 안다. 또 몇 시간 후에는 제발 모든 것을 멈춰달라고 간청하고 그 무시무시한 죽음에서 벗어나도록 애원하리라는 것도 안다. 아니, 그보다 더 심할 수도 있다.
책의 두께만큼이나 수많은 등장인물이 나온다. 생소한 지명과 외국어 이름은 늘 독서의 장벽이지만 저자 '막심 샤탕'은 물 흐르듯이 이야기를 펼쳐내며 적재적소에 등장시키고 빼면서 부담을 덜어준다. 이야기의 짜임새는 과학적인 분석을 한 것처럼 매끄럽게 절단되어 있다. 연쇄살인마가 등장하고 범인이 인종, 나이, 성별이 안겹치게 '사냥'을 한다는 점을 밝혀내는데 절반, 그 범인을 추격하는데 나머지의 절반, 그리고 범인이 누구인지, 왜 그렇게 했는지를 알려주는데 다시 그 나머지를 쓴다. 이야기는 범인이 남긴 수수께끼 같은 메세지를 풀어나가는 방식으로 전개되는데 셜록 홈즈같은 고전적 방식이다. 하지만 전혀 촌스럽지 않고 오히려 반가울 지경이다. 범인이 경찰이라는 점, 식인을 통해 우월감을 가진다는 다소 뻔한 결말을 가져가면서도 이 소설의 수수께끼 풀이식의 추리 때문에 지치지 않고 흥미롭다.
칼리반은 최고의 쾌락이자 권력이 됐어요. 인간을 넘어서는 방법이래요. 오빠는 항상 밥이 한 말을 반복했어요. '칼리반, 그것들은 주인들의 목소리'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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