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수레의 책읽기

[아주 오래된 농담] 나쁜 관습에 대하여

슬슬살살 2021. 4. 23. 21:31

제목에 농담이 들어가지만 이 농담은 결코 재밌지 않다. 여기서의 농담은 우스개소리가 아니라 자조의 표현이며 허무의 기억이고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굴레를 바라보는 남자의 자포자기한 심정이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의사인 영빈이지만, 한쪽 뇌리에 박혀있는 기억이 있으니 시간이 지나도 또렷하게 남아있는 한 발칙한 여자아이, 현금의 기억이다. 


너 커서 뭐가 될래? 그건 어릴 적에 누구나 흔히 듣는 질문이고, 더는 아무것도 될 수 없는 어른들의 심심파적일 따름이다. 아이들은 운전수, 교통순경, 로봇, 군인, 가수, 사장, 대장, 텔런트, 판사, 박사, 과학자 등등 수없이 말을 바꾸어도 일일이 기억할 필요도, 책임질 필요도 없었다. 어디서 현금은 기억하고 있을까. 어릴 적 무심히 내보인 한 치 혀가 한 사내를 특정 기억에 못박았다는 것을. 


그 기억이 어찌나 강렬했는지 중년에 이르러서도 그녀를 잊지 못한다. 사실 초등학교 때 짝사랑이야 여자에 대한 감정이 아닐수도 있지만 그 묘한 감정이 사춘기를 시작하려는 남자아이에게 화살처럼 꽃힌채 아물지 못한 것일 수도 있겠다. 아무튼 이 소설은 잠깐의 강렬한 기억을 심어준 여자아이를 중년에 다시 만나 불륜에 빠지는 신파다. 하지만 작가가 박완서인데 그런 단순한 이야기를 심었을리 없다. 

 

헛것만 보았지 한 번도 진실을 보지 못했다. 최후의 순간에야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똑바로 보았을 것이다. 눈뜨고 죽은 모습이 보기 좋은 건 아니더라도 바보처럼 끝까지 속아 산 건 아니라는 게 영묘에겐 위안이 되었다. 요절했지만 불의에 중툭이 잘린게 아니라, 나름대로 완성된 삶으로 보고 싶었다. 


영빈의 막내동생인 영묘는 유복자로 아비를 잡아먹고 태어난 가시내로 키워지다가 재벌가에 시집을 가지만 졸부가에 의해 사육되는 듯한 시집살이를 한다. 그런 영묘를 친정 엄마는 불쌍히 보기는 커녕 팔자 타령이나 하고.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한 형은 모든 동생들을 키워놓고는 마치 할일을 다했다는 듯이 미국으로 도망치듯 떠난다. 영빈은 고독과 외로움 속에서 결핍을 현금에게 찾으려 하고. 


남녀 갈등이 2021년의 가장 강력한 화두다.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남녀는 가부장제의 피해자들이다. 영빈은 가정을 지킨다는 명분 아래 사랑을 찾으러 떠나지 못하고, 형은 가족을 위해 희생한 후에 지친 채로 한국을 등진다. 영묘는 여자라는 이유로 재벌가에서도 인형 취급을 받으며 옛 사람인 엄마는 아들 타령을 잊지 않는다. 지금의 세상에서 남녀는 서로를 탓하지만 박완서 작가가 이 소설에서 보여 주듯이 이것은 시대가 만들어낸 아픈, 또 나쁜 기억이다. 이 말같지 않은 가부장제야 말로 가장 오래된 농담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