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수레의 책읽기

[원미동 사람들] 가난한 고독의 도시

슬슬살살 2021. 5. 29. 11:32

지금은 봄꽃 나들이로 알려진 원미동이지만 20년 전의 그곳은 그야말로 서울에서 밀려난 노동자들의 도시였다. 늦게 개발된 터라 토박이는 없고 먹고살기 위해 서울 언저리를 헤메이거나 도시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아웅다웅 살아가는 곳. 집이 있다는 것으로 간신히 빈민을 벗어난 이들의 집합체, 겉으로는 정이 넘치지만 치열한 호구지책 속에서 날카로운 사람들의 고독한 도시다. 양귀자가 잠시 머물려서 관찰한 원미동의 모습에는 놀라운 산업 발전의 음지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레트로로 치장하기에는 너무나 팍팍하며 변두리의 낭만 같은 건 현실에 없다는 걸 날카롭게 그려낸다. <멀고 아름다운 동네>와 <불씨>에서는 실업과 동시에 서울에서 변두리로 밀려나거나, 영업 일선에서 입도 벙끗 못하는 가장을 그리고 있다. 또, 여성 작가를 화자로 그린 <한계령>에서는 어린 동생들을 위해 희생하고 하얗게 타버린 재 같은 인생을 산 '큰오빠'가 다뤄진다. 

머지않아 여관으로 변해버릴 집을 둘러보며, 집과 함께해온 자신의 삶을 안주삼아 쓴 술을 들이키는 큰오빠의 텅 빈 가슴을 생각하면 무력한 내 자신이 안타까웠다. 아버지 산소에 불쑥불쑥 찾아가서 죽은 자와 함께 한 병의 술을 비우는 큰 오빠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한 인간의 뼈저린 고독은 살아 있는 자들 중 누구도 도울 수 없다는것, 오직 땅에 묻힌 자만이 받아 줄 수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였다.

요즘 세태에 반하는 캐릭터이기는 하지만 60년대에서 80년대를 살아온 이들에게 남성은 가부장임과 동시에 희생하는 부역자임은 당연한 일이고 양귀자 작가는 그런 데에서 오는 비애를 강하게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가난이 고통이라면 가난한 가장에게는 고독마저도 더해진다. 

양귀자 작가는 가난을 테마로 하는 원미동의 아웅다웅을 그리면서도 작은 웃음을 잃지 않는다. <비 오는 날이면 가리봉동에 가야한다>나 <일용한 양식>에서는 어리숙한 이들에 대한 조롱을 가미한 블랙 유머를 보여준다. 원미동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11편 모두 개개인의 사연과 사회적인 문제인식 뿐 아니라 가난에 대한 동정과 슬픔, 어느정도의 향수에 이르기까지 복합적인 감정을 겪게 해 준다. <응답하라>시리즈의 향수는 아니지만, <탁류>의 처절한 가난은 아니지만, <원미동 사람들>은 정신적인 가난이 얼마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지, 작은 희망이 후에 어떻게 향수로 승화되는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