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무장 해제의 옹호자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면 전쟁이 견딜 만하고 품위 있는 것이 되리라 믿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이 책을 읽고 드레스덴의 운명을 깊이 생각해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곳에서는 재래무기를 이용한 공중 공격의 결과로 135,000명이 죽었다. 1945년 3월 9일 밤에는 고성능 소이탄을 이용한 미국 중폭격기의 도쿄 공중공격으로 83,793명이 죽었다. 히로시마에 투하한 원자탄은 71,379명을 죽였다.
2차 세계 대전의 모든 전투가 그렇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지옥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던 곳이 바로 드레스덴이다. 아마 공격자가 연합군이고, 폭격지가 독일이어서 많이 알려지지 않았겠지만 전쟁에서 독일이 항복을 선언한 게 저 멀리 일본에 떨어진 핵 때문일 리는 없지 않나. 이 작은 공업도시에 4일 동안 쏟아진 폭탄의 양은 무려 3,900톤이고 사망자는 히로시마 원자탄의 2배다. 그야말로 불지옥을 현세에 보인 폭격이 드레스덴 폭격이다. 이 책의 가장 큰 주제, 반전을 다루는데 이보다 좋은 소재가 있을까. 실제로 커트 보니것은 2차 대전 당시 참전해 독일에 포로로 잡혔고 드레스덴 폭격을 겪었다. 때문에 이 소설은 작가의 자전적 소설인 셈이다. 어쩌면 빌리 필그램의 정신 이상 증세는 실제로 작가가 겪던 것일지도...
우리 삼촌은 베트남 전쟁에 갔었는데 다녀 온 뒤에 정신이 약간 이상해졌대. 자기가 외계인에 납치당해 실험을 당한 적이 있다나 어쩐다나. 저런, 아마 전쟁 후유증으로 그러신 걸 거야. 전쟁은 참 끔찍해.
많은 작품에서 뻔하게 쓰이고 있는 일종의 전쟁 PTSD 클리셰다. 참전 군인이 정신적으로 이상해지고 주위사람은 안타까워하는 장면, 그리고 전쟁이 나쁘다는 교육적 주제를 드러내는 방식. 미국의 대표적인 반전작가 '커트 보니것'이 전쟁을 바라보는 방식은 조금 다르다. 이 소설에도 전쟁 이후 정신 나간 주인공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동정의 여지를 남기지 않고 그야말로 제대로 미친놈을 그려 낸다.
빌리 필그램은 트랄파마도어의 생물들에게는 우주가 수많은 밝고 작은 점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생물들은 각 별이 어디 있었는지 또 어디로 가는지 볼 수 있으며, 따라서 하늘은 흐릿하게 빛나는 스파게티로 가득 차 있다. 또 트랄파마도어인은 인간을 다리가 둘 달린 생물로 보지도 않는다. 그들은 인간을 커다란 노래기로 본다 - "한쪽 끝에 아기 다리가 달려 있고 다른 쪽 끝에 노인 다리가 달려 있는 노래기"라고 본다. 빌리 필그램은 그렇게 말한다.
2차 대전이 끝나갈 무렵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공중 폭격이 드레스덴에 퍼부어졌다. 주인공 빌리 필그램은 이 지옥에서 살아남은 몇 안되는 참전 군인이지만 덕분에 정신이 나갔다. 그는 자신이 트랄파마도어라는 우주 행성에 잡혀갔다가 그들의 능력으로 시간과 공간을 헤매고 다닐 수 있게 되었다고 믿는다. 그 일인칭 시점을 얼마나 잘 그려냈는지 편집증 환자의 머릿속을 펼쳐서 그 안에 있는 글자를 모두 모으면 이 책이 될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보니것은 이 편집증 환자의 시간여행을 통해 2차 세계대전과 현재에 동시에 존재하는 인간 빌리 필그램을 만들어 낸다. 우리는 빌리 필그램의 일그러진 시간 여행을 통해 전쟁의 경험이 한 인간의 정신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주변 인물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동시에 경험할 수 있다.
뭐 그런거지
이 책에서 거의 모든 죽음 뒤에는 이 말, '뭐 그런 거지'가 들어간다. 자조와 더불어 블랙 조크를 내포하고 있는 이 대사를 통해 인간이 얼마나 멍청한 이유에서 죽어나가고 있는지를 반어법으로 비웃는다. 인간이란 얼마나 어리석은지. 저렇게 푸념 섞인 단어 한마디에 담긴 죽음이 10만 단위라니, 이렇게 인간의 운명을 가축의 위치로 끌어내리는 것이 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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