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수레의 책읽기

'2015년 제15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 한강, 눈한송이가 녹는동안 外

슬슬살살 2022. 5. 16. 22:50

한강 -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 / 한강 - 에우로파 / 강영숙 - 맹지 / 권여선 - 이모 / 김솔 - 피커딜리 서커스 근처 / 김애란 - 입동 / 손보미 - 임시교사 / 이기호 -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 / 정소현 - 어제의 일들 / 조해진 - 사물과의 작별 / 황정은 / 웃는 남자


2015년에는 어떤 일이 있었나. 먼저 세월호 사건의 다음 해라는 게 떠오른다. 전 국민이 입은 상처가 아물기는커녕 양 진영으로 나뉘어 그야 말로 더러운 정치공방이 이어지던 해였다. 많은 사람들이 아이들의 죽음에는 눈을 가린 채 정치적인 메시지로만 날을 세우던 때였다. 연말에는 최순실 게이트가 터져 나왔고. 우리는 이 한 해의 문학상을 통해 2015년의 분위기를 다시 읽어낼 수 있다. 

이 해의 황순원 문학상은 한강 작가에게 돌아갔다. 대중에게 그녀의 이름이 각인된 게 2016년 맨부커상 이후이지만 그전부터 실력만큼은 인정받고 있었다. 중단편을 뽑는 황순원 문학상에서 한강 작가는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이라는 신비로운 분위기의 단편으로 수상했다. 겉으로는 신동아의 기자 해고 사태를 다룬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저항해야 할 때 저항을 외면해 버린 평범한 이들이 만나게 되는 자괴감과 부끄러움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물론 세월호 이전부터 썼던 작품이지만 이 작품이 세월호 한 해 뒤에 수상한 건 의미심장하다. 눈 한송이가 녹는 짧은 시간 동안 자기의 가치관을 포기하면서 온정을 베풀고 부처가 된 달달박박과 유혹을 두려워해 여인을 저버린 노힐부득의 이야기가 녹아 있는데 한강 작가는 이 이야기에서 그 누구도 부처가 되지도 못했으며 길 잃은 여인 또한 관음보살이 아닐 거라 말한다. 시험에 들게 하거나 그걸 피하거나 받아들인 모두가 피해자라는 우스운 양비론이지만, 딱 세월호가 그랬다. 세월호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한 관음보살도 아니었고 그들을 열심히 구조한 젊은 영웅들도 부처는 아니었으며 그들을 저버린 많은 기성세대는 구원받아서는 안된다는 의미이려나. 

언제였을까. 그의 자취방에서 과도로 참외를 깎아 쪽을 내고 참외 씨를 미세하게 바르며 그의 등허리를 바라보았던 그 봄은. 그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병아리 빛깔의 수채화 같던 그 봄날의 오후는. 그리고...... 그녀는 현관 구석에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장갑 낀 양손을 번갈아 쥐었다 놓았다. 당장이라도 과도를 움켜쥐고 무엇을 찌를 듯이, 장갑 속의 언 손가락들을 바르르 떨게 만드는 이 붉고 어두컴컴한 증오가 무엇인지 알 수 없어 그녀는 오른손으로 왼손을 쥐었다 놓고 왼손으로 오른손을 쥐었다 놓았다.  (권여선 -이모)


권여선 작가의 이모는 인생의 허무함을 그려냈다. 가족을 부양하느라 젊음을 모두 보낸 한 여인이 강하게 늙어가지만 결국 늙음이란 "무섭고 서러운 감정"을 동반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날카롭게 보여준다. 결국 늙음이란 처연할 수밖에 없다. 

한동안 집이 생겼다는 사실에 꽤 얼떨떨했다. 명의만 내 것일 뿐 여전히 내 집이 아니면서 그랬다. -(중략)- '반의반' 또 '반의반의 반'크기로 접힌 종이 위에 외발로 선 채 가족을 안고 부들부들 떠는. 그렇지만 결국 살았다고 카메라를 보고 웃는. 대학 동기 몇은 벌써 내게 집 장만을 했냐며 부러움 섞인 축하를 건넸다. 그때마다 나는 '그래 봤자 하우스푸어'라고 겸연쩍게 변명했다. (김애란 - 입동)


개인적으로는 가장 슬프면서도 날카롭게 느껴진 작품이 이 입동이다. 소시민으로서 열심히 모아서 작은 집을 장만했지만 아이의 죽음을 맞닥뜨리고 어쩔 수 없이 살아가야 하는 부부의 심정이란 건 어떤 걸까. '자식 앞세운 죄인'이라는 진부한 표현 뒤에는 그들도 웃고 즐길 수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날카로운 메스를 들이대는지. 도배로 상처를 덮는 행위처럼 아픔은 감춰질 뿐인데. 사람들은 마치 도배가 집을 다시 지은 것으로 착각한다. 상처는 도배지 뒤에 그대로 있다. 

무엇이 잘못됐는지도 모른 채, 나는 그렇게 계속 자리를 지키려 꾸역꾸역 애를 썼던 것이다. 
(이기호 -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


이 작품은 사람의 선의와 받아들여짐, 정의와 진실이 미묘하게 뒤틀리는 걸 지켜보게 한다. 모두가 각자의 사정이 있고 모두가 맞는 말이지만 결국 인간은 이기적인 채 그 자리를 지키려 꾸역꾸역 애를 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