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을 비평하거나 평론하는 사람들의 글을 읽다 보면 두 가지 의문이 생긴다. 저 예술가는 정녕 저런 의도를 가지고 이 작품을 만든 걸까?, 어떻게 하면 저 현상을 저런 식으로 분석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 나는 보지 못하는 작가의 의도를 꿰뚫는 혜안이 부럽고 나보다 더 풍족한 삶을 살아가는 듯한 평론가의 모습에 질투를 느끼기도 한다. 그렇지만 기실 모든 작품은 모든 사람에게 다르게 다가가기 마련이고 심지어 작가의 의도라는 것도 알고 보면 직관적인 것 투성이니라 비평은 사실상 오독-즉, 잘못 읽어 내리는 것에서 온다. 물론 작가의 의도가 명확하게 들어나는 부분이 있을 수 있지만 그 이면에 있는 정신병리학적 의도나 창작자의 무의식에서 발현되는 장면은 다른 이가 알아채 주어야만 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누가 감히 다른 사람의 머릿속을 꿰뚫는다 장담하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모든 비평은 오독에서 나온다.
모든 글쓰기는 필연적으로 읽기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모든 독서는 오독이고 모든 번역은 오역이라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비평의 역사는 오독의 역사라고도 한다.
그러나 잘못 읽는 것이 잘못일까? 오히려 김종희 교수는 ‘창조적 오독’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들어 작자의 의도를 넘어서는 새로운 창작의 영역이라고 바라본다. 그렇다고 오독이 비평서는 아니다. 그냥 김종희라고 하는 나름의 비평가가 삶을 살아오면서 한 두장 씩 기록한 지난날의 일기 같은 산문집이다. 그러기에 어떤 단락은 자랑으로 가득차고 어떤 단락은 강의자료 같기도 하는 등 일관된 맥락은 보이지 않는다. 거기에 중언 부언 하는 글쓰기 버릇이 보여 과연 소설가가 되지 못한 비평가라는 걸 자명하게 보여 준다. 오독이 필요할 만큼 중요한 글은 아닌 셈이다. 그래도 중요한 점은 내가 읽고 느끼고 분석하는 의도가 작가의 의도와 다르더라도 그 자체로 하나의 창조가 된다는 걸 배웠다. 조금 더 독서에 적극적이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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