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수레의 책읽기

<객주>조선의 마지막을 누빈 보부상들의 애환과 생애를 다룬 명작. 읽어보면 언어영역 점수 오를껄?

슬슬살살 2012. 4. 18. 21:57

간만에 장편 소설을 읽었다. 궂이 따지자면 대학다닐 때 '누가 이땅에 사람이 없다 하랴'가 마지막이 었던 것 같다. 물론 중간중간 판타지 류는 조금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이정도 분량을 독파한건 정말 오랜만이다. 9권이라는 분량을 소화하는데 2주정도가 걸려서인지 잊고 빠져나오는데도 시간이 좀 걸렸다. 

 

이 <객주>라는 소설은 한국문학의 거성 김주영 작가가 전국을 발로 뛴 현장성과 200여명의 인터뷰를 거친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씌여진, 필력이 아닌 노력으로 쓰여졌다 해도 과언이 아닌 작품이다.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가장 곤혹스러운 것이 바로 어휘였다. 이 책에서 작가는 꼭 그 시대에서 살다 온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그 시대의 어휘와 말투를 재현해 냈다. 심지어는 사람의 생각이나 주변 분위기의 묘사까지도 철저하게 그시대의 어휘를 사용했다. 그때문에 읽기는 무척이나 어려워졌지만, 현장성만큼은 완벽하게 살아났다. 얼마나 난해한지 아무 글귀나 랜덤하게 옮겨볼까?  

 

"녹비혜는 좋지 않아. 시골 양반티를 내야지 공연히 서울 시체 모양을 내변 오히려 유표할 뿐 아니라 그 유표한 덕분으로 실수가 눈에 더 뜨일 터이니 그저 시골 토반으로 문벌이나 있고 형세가 굶지 않는 형국이면 되겠지. 동티를 낸 뒤 피신할 적에도 녹비혜는 추심할 놈들의 표적이 될 것이고(2권 40P)"

 

앞 뒤 문장으로 개략적인 의미가 이해는 가지만 세세한 뜻을 알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해서 초반에는 뒷장에 붙어있는 어휘풀이를 어지간히 뒤적여야 3~4권부터 간신히 진도가 빠진다. 물론 빨리 읽기에는 죄송스러울 정도로 고생한 글이기는 하지만...1

전체적인 내용의 흐름은 천봉삼이라는 천민 출신의 보부상을 주인공으로 하여 조선시대 유통의 중심이었던 보부상들의 애환과 사랑을 다루고 있다. 천봉삼은 몇몇 동지들과 상인으로서 성공을 위해 노력하지만, 불의를 참지 못하고 정의감에 불타는 인물이다. 수많은 일들을 겪으며(9권에 달하는 수많은 에피소드를 여기에 주저리 주저리 늘어놓을 생각은 없다) 대형 상단으로 성장해 나가지만 구한말의 어수선한 정국과 맞물리고 민비, 대원군 등 역사적인 인물들과 얽혀 들어간다. 재미있는 것은 이 글에서 나오는 민비나 대원군은 우리가 드라마에서 보아오던 인물과는 많은 차이를 보이는데 "나는 조선의 국모다"라는 진위를 알 수 없는 대사를 내뿜는 국모 명성황후 대신, 무속에 빠져 내탕금을 굿으로 탕진하기에 바쁜 어리석은 왕비가 있다. 대원군 역시 나라를 사랑하는 완고한 노인이라는 이미지보다 노쇠한 정치인에 더 가깝게 그려지고 있다.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훨씬 현실적인 묘사였다 생각된다.2 

 

이 책의 또하나의 특징은 3인칭 시점에서 글을 전개하고 있음에도 작가가 전혀 개입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무슨 말이냐면 역사소설의 경우 작가의 부연설명이 글로서 들어가야 하는 경우가 꽤 있다. 역사적 사실이나 가상을 구분해야 할 때나 당시의 시대상을 설명해야 할 때 등등3.. 그러나 9권을 싹 뒤져봐도 작가의 개입은 전혀 없다. 이 글이 그 시대에 쓰여진 글을 다듬은 작품이라 해도 꼼짝없이 믿어질 지경이니 작가의 내공에 혀가 내둘러진다. 

 

 

<기산풍속도첩>에 실려있는 객주의 모습

역사적인 배경이 조선말기이다 보니 무지하게 오래된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 작가의 나이를 생각하면 고작 1세대 위의 이야기이다.4 양반과 사대부들이 몰락하고 상업을 바탕으로 한 자본주의의 초창기로서 어수선한 시대를 배경으로 역사적 인물이 아닌 천민들..당시 보부상들을 중심에 놓고 역사의 흐름을 잘 표현한 수작 중의 수작이다. 83년에는 드라마로 제작되어 방영되었다고도 한다. 

 

긴 긴 내용 중에서 이 책의 주제를 가장 잘 표현한 문장을 옮겨본다. 120년전의 이야기이지만 오늘날 한국의 정치를 바라보는 국민들에게도 경종을 울릴만한 명글이다. 읽는 것만으로도 큰 공부가 되는 책이니 많은 사람들이 접했으면 좋겠다.    

소가 걸어가면 워낭소리가 나지요. 설사 소가 잘못 가고 있더라도 워낭소리만 귀여겨 듣고 있으면 길을 바로잡기가 수월한 법, 우리 백성이 깨어 있어야하고 귀를 기울여야 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이 한몸 소진되어 소의 워낭소리라도 귀여겨 들을 줄 알게 되면 그것으로 이승에 태어났던 보람이 되겠지요.(9권. 천봉삼이 조성준에게 작별을 고하며)  




객주

저자
김주영 지음
출판사
문이당 | 2009-01-3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1981년 발간 이래 저자의 대표작이자 2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PS. 이용익이라는 실존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 양반이 고대를 세운 이용익과 동일 인물일까요?

 

  1. 학생들이라면 이 글을 읽고 당장 객주를 시작하기 바란다. 모르긴 몰라도 언어영역 점수가 5점이상 오르리라 확신한다. [본문으로]
  2. 위정자들이 드라마 같이 올곧았으면 아무리 힘이 없어도 600년이 넘는 왕조가 그리 허무하게 무너지지도 않았을게다. [본문으로]
  3. 예를 들면, 당시에는 ~~~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하는 서술 등 [본문으로]
  4. 내가 6.25 이야기를 쓰는 것과 같은 정도?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