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현대소설, 특히 단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과장된 비유와 은유가 마음에 들지 않고, 일부러 숨긴 메세지가 마음에 들지 않고, 그속에 담겨있는 허무주의가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런면에서 '아름답고, 낮설고, 허망한' 은희경의 단편들은 나에게 썩 좋은 글들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점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충분히 맛있으리라.
가끔씩 익숙한 장소를 걸을 때 그곳이 낯설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그 때 다가오는 감정이 허망한 아름다움이다. 갑자기 삶이 무기력해지면서 옛생각이 나기도 하고 삶에 대한 반성이 들기도 한다. 여기 실린 글들은 바로 이 허망함과 낯섦을 다루고 있다. 그것들을 위해 그녀의 단편들에는 일관된 소재가 등장하는데 바로 지도이다. 사람은 한곳에서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존재이다. 시간이든 공간이든 간에.. 지도라는 건 원래 이동하는 이들에게 자신의 위치와 가야 할 방향간의 관계를 보여주는 도구이다. 그런데 여기서 본인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거나, 가야할 곳의 위치를 찾을 수 없게 되면 인간은 외롭고 허무하게 되는 것이다. '고독의 발견'에서는 환상의 대상인 W시의 지도가 등장하고'날씨와 생활'에서는 지도대신에 가는 방법을 찾을 수 없는 상황이 등장한다. '지도중독'에서는 지도만을 들여다보는 P의 지도가 등장한다.
- 의심을 찬양함(2007년)
쌍둥이 남성과 얽히게 된 유진이라는 흔한 이름을 가진 여자의 이야기. 세상의 불규칙성과 규칙성 사이에서 오는 혼란.
"세상은 그야말로 제멋대로 굴러가요. 더렁움과 증오와 한심함으로 가득 차 있어요. 솔직히, 아무렇게나 살아도 상관없는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누구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이 세상이 모두 정밀하게 짜여진 각본대로 움직인다고 생각하세요?
그렇다면 나는 아마 각본대로 뛰지 않는 토끼일꺼에요."
- 고독의 발견(2006년)
K는 하숙생 시절 기억에서 떠오른 환상의 세계인 W시와 그곳에서 만난 난장이 여인을 통해 자신의 38년 삶의 허무함을 느낀다.
난장이와 낮선 도시라는 소재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향기가 난다.
"몸을 가볍게 만드는 연구가 드디어 완성되었어"
-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2006년)
이 모음집의 표제가 된 작품이다. 뚱뚱하고 추한 모습을 물려받은 주인공은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다이어트를 한다.
어느정도 살이 빠진 모습으로 아버지의 장례식을 찾지만 결국 그곳에서 폭식을 한다.
비만이라는 추함과 고독을 극복하려 하지만 결국 고독함을 넘지는 못한다.
"내가 늘 보띠첼리의 비너스를 바라보았던 것은 다른 뭔가를 보지 않기 위해서였다."
- 날씨와 생활(2006년)
소녀 B는 늘 자신이 특별한 주인공이 아닐까 하는 공상을 한다. 전학을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남자가 학교로 찾아오지만 B의 기대와 달리
그 남자는 책 할부금 수금원이다. 수금원을 데리고 집으로 가는 도중 온갖 비련의 상상이 그녀를 괴롭혀 결국 혼절한다.
그러나 정작 엄마와 수금원은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을 맞는다. 개인적으로 가장 재미있었던 단편이다.
사실 인생이라는 것이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게 별게 아닌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그러나 거대한 흐름에 실려 어디론가 떠내려 가지만 B는 한번쯤 자기를 실은 배에서 벌떡 일어나 작고 하얀 손을 높이 쳐들어서,
마치 춤을 추듯 유쾌하게 흔들어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 지도중독(2005년)
평범하고 변화를 싫어하는 타입의 M은 갑자기 선배 Y의 부름으로 캐나다에서 로키산맥 여행을 하게 된다.
(애니어그램의 9번 타입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와 관련한 책에 대한 리뷰를 쓴 적이 있다: http://blog.daum.net/albatro9/460).
로키산맥에서 Y의 선배 P와 함께하지만, 그는 지도에 중독되어 있으면서 정작 자신의 위치와 가야 할 곳을 찾지 못한다.
지도를 손에 들고도 고독한 존재. 그러나 열심히 지도를 본것 만으로 로키산맥에서 곰과 만난다. 그 조우는 인생에서의 아름다움과 천연함을 선사한다.
이처럼 인생에는 자연의 빛나는 곰처럼 장쾌한 순간이 있다. 다만 곰처럼 적당한 거리에서 적당한 시기에 만나지 못한다면 당신을 파괴할 수도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기대와 두려움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다. 지도를 항상 확인하라.
"원점 O가 확실하면 P의 위치는 구할 수 있는 법이거든"
인생이란 로키산맥을 여행하는 것이다. 가끔 만나는 곰이 아름다울수도 있고 목숨을 잃을 수도 있지만..
- 유리 가가린의 푸른 별(2005년)
출판사의 사장으로 나름 성공한 인생을 살고 있는 K는 지인인 J의 유학과 함께, 기억의 단편에 강렬하게 남아있는 한장면과 교신한다.
그것은 유리 가가린이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보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지구는 푸른 별이다'.
K의 청춘 역시 푸르렀으나 그것은 힘들게 우주에 가서야만 알아차릴 수 있는 것처럼 나이가 들어서야 눈치 챌 수 있는 것이다.
어째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장 중요한 시기에 보이지 않는걸까?
"유리 가가린의 아름답고 불안한 청춘도 거기 함께 있다."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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