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통신소설의 가능성을 보여준 최초의 소설. 하이텔 공포란에 연재되어 뜨거운 히트를 올렸던 전설의 작품. 퇴마록을 다시 읽었다.
역시 기억은 왜곡되기 마련인건가. 가슴속에서 최고의 장르소설로 남아있어 혹자들이 한국형 판타지 1세대라는 칭송을 붙일때에도 당연하다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 책을 처음 접했던 내 나이는 중학생. 지금 다시 읽었을 때의 느낌은 그때와 사뭇 다르다.
퇴마록의 장르는?
먼저, 작품의 장르부터 정리를 좀 해야겠다. 1세대 한국형 판타지로 구분짓는 이들이 많은데, 광의적 개념에서의 판타지는 맞는 듯 하다. 다만 한국형이라는 것은 조금 더 고민이 필요한 부분인데, 단지 배경만이 한국이라 해서 한국형이라 붙이는 것은 좀 아닌 듯 하다. 오히려 대세를 이루고 있는 무협과 판타지의 차원이동물들이 오히려 한국형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K팝이 국악이 아닌 것처럼..). 적어도 국내편에 한해서는 오컬트 요소가 가미된 무협이 맞는 듯 하다. 하이텔 공포 코너에서 연재되기는 했지만, 적어도 국내편에서 공포는 단편 몇편에 국한 되어 있다. 오히려 '초치검의 비밀'이나 '측백산장', '초상화가 부르고 있다'등 다소 긴 편에서는 무협적인 요소가 강하다. 하지만 장르가 무에 중요하겠는가. 작가의 말에서 밝혔듯이 재미가 가장 중요한 것을.. 그리고 훌륭하게 하나의 세계를 완성했다는 점에서 판타지로서도 기념비적인 작품임은 확실하다.
작품의 수준
작품의 질적 퀄리티를 보면 그 이름값에 비해 한참이나 미치지 못한다. 하기야 전문적인 글쓰기를 배우지 않은 공학도가 출판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써내려간 글에서 질적 수준을 논한다는 자체가 아이러니다. 지금도 이우혁 작가의 문장은 사실 높은 수준이라 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다만 아마추어만이 할 수 있는 과감한 시도들을 이것 저것 한 것은 눈에 띈다. 예를 들면 단순하게 3인칭적인 서술을 주로 따르되, 2인칭 서술, 1인칭 서술 등을 병행하여 사용하는 노력은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글들에 다양한 효과를 넣어보려고 꽤 깊은 고민을 했음을 보여준다. 또, 역사적인 고증을 교묘하게 인용하는 영특함을 보여 주었는데, 이 역시 팩션의 기본중의 기본이다. 국내 최고의 공학대학에 다니는 이 답게 이같은 고증들을 재료로 사용하면서 그럴싸한 가설들을 끊임없이 생산해 내 작품과 연결해 내고는 가상의 리얼리티를 불어넣었다.
이우혁 하면 그가 창조하는 캐릭터를 뒤로 할 수 없다. 그가 그리는 캐릭터들은 현대소설처럼 복합적인 면들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만화에서처럼 단편적인 인물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그런 만화적인 인물들이 적절하게 조합되면서 읽는 이로 하여금 각 캐릭터의 역할과 개성을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게 하고 이는 캐릭터에 감정을 투영하게 만든다. 이 캐릭터의 배치, 적절한 하나의 팀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아마도 이우혁 작가의 가장 큰 장점이 아닐까 생각된다. 사실 PC통신으로 연재 했다는 얘기 자체가 작품의 큰 그림을 가지고 움직이기 보다는 단편적인 요소들로 이어가려 했던 것 같다. 후반부로 갈 수록 작품의 전체를 그리기 시작한 것으로 보여지는데 처음부터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 치고는 상당히 촘촘한 구성을 가지게 되었고, 마침내 새로운 세계가 만들어졌다.
특히 국내편은 다양한 공포 에피소드를 포함해 작가의 역사인식, 세계관 구축, 캐릭터 설정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각각의 에피소드도 흥미롭지만 점차 구축되어가는 퇴마사 팀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퇴마록의 세계관
퇴마록의 세계관은 다신론, 민족주의로 압축 될 수 있다. 적어도 국내편에 있어서는 그렇다. 사실 다른 신들의 융합은 어떻게든 만들어 낼 수 있었겠지만 유일신을 주 교리로 삼고 있는 기독교와 카톨릭의 삽입은 상당한 연구가 필요했다. 그래서 이우혁은 재미있는 가설을 하나 세웠는데 바로 신화의 각 국가별 대응 요소가 있다는 가설이다. 국내편 2권 '생명의 나무'편에 잘 나타나 있다.
'인도의 만신전이나 이집트 신의 계보, 그리스의 신들, 북구의 신들은 대체적으로 유사하거나 일대일 대응의 요소를 지니는데 이는 자연력을 추상적으로 묘사하여 신격화 시켰기 때문이며, 또 실제로 자연력들은 응집되어 하나의 개별화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러한 종교관 및 대신관은 비록 그 유래가 오래되었더라도 훨씬 더 현실적인 것으로 이후, 인간의 부족한 사고 및 이성으로 윤색되고 변질 된 신의 추상적이고 거대한, 무소불능의 형태보다 훨씬 사실에 가깝다.'
민족주의야 따로 예시를 들지 않더라도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국내편까지만 하더라도 작가는 힘의 올바른 사용이 그 주제라고 서두에도 밝히고 있기는 하지만 여러가지 에피소드에서 민족주의적인 성격이 무리하게 드러나 있어 자칫하면 잘못된 역사인식을 심을 수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가상이기는 하지만 읽을 때 주의해야 할 점이기는 하다.(억지로 통제할 필요는 없지만 스스로 인식하기는 해야 할 듯 하다.)
사람이 믿는바가 사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믿음을 무엇에 쓸 것인가.
당시의 여건에서 새로운 크리에이티브를 보여준 것만은 사실이며 한국형 장르소설에 새로운 지평을 연것 도 사실이다. 또 PC통신 출신의 베스트셀러라는 점에서 새로운 기념비를 만들어낸 것 역시 인정할 만한 성과이다. 그러나 작품만을 냉정하게 놓고 봤을 때 신격화 될만한 수준의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우리는 이 작품에서 대한민국을 대표할 만한 걸출한 장르작가가 탄생한 것에 감사해야 한다.
원작의 인기를 등에 업고 영화로도 질렀지만 결과는 안습..
아마 현재의 기술로도 퇴마록 시리즈를 영화화하기는 쉽지 않을걸?
퇴마록 국내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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