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정’하면 뛰어난 직관을 가진 셜록홈즈나 포우가 우선 떠오른다. 하지만 꼭 머리를 쓰는 탐정만 있는 것은 아니다. 스타는 아니지만 반대편에는 필립 말로우 같은 하드보일드 탐정도 엄연히 존재한다. 기본적인 추리를 펼치기는 하지만 몸을 더 많이 쓰는 존재들. 이 책의 주인공인 사와자키는 후자다. 필립 말로우보다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때문에 두뇌파로 오인할 수 있지만 냉소적이고 현실적인 탐정. 가슴 한 켠에 의리와 낭만을 품고 사는 사와자키는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탐정이다.
이 소설은 정식으로 의뢰받지 않은 사건의 의뢰인을 추적하는데서 출발한다. 처음에는 의뢰인, 그 다음에는 사건 관계자, 의뢰인의 주변 인물들, 11년 전의 목격자. 점차 추리의 영역을 확대시키지만 본질은 하나다. 진실로 가기위한 증거의 수집. 지루할 정도로 증거의 수집에 집착한다. 현실적이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재미없다. 이 책의 ‘진짜’는 스트레이트에 있다. 독자가 사건의 전말을 추리하기 한 템포 전에 한번에 들이친다. ‘하라 료’는 가벼운 잽과 스트레이트가 잘 분배된 복서다.
8개월만에 사무실로 돌아온 사와자키에게 의뢰가 들어온다. 우오즈미 아키라라는 이름의 청년의 의뢰이지만 정작 노숙자로부터 사건을 전달 받는다. 때문에 사건 대신 의뢰인을 추적하는 것이 시작이다. 어렵사리 찾아낸 아키라는 11년전에 자살한 그의 누나 유키의 죽음에 대해 밝혀 달라는 요구를 한다. 당시 촉망받는 야구선수였던 그에게 고시엔 8강전에서 승부조작 혐의가 씌어졌다. 결백이 밝혀지지만 그 과정에서 누나 유키가 자살한다. 석연치 않은 그녀의 죽음을 조사해 나가자 의외의 비밀들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낸다.
추리소설의 결론을 밝히는 무책임한 짓은 하지 않겠다. 어찌 됐던 사건은 깔끔하지만 의뢰인에게는 찝찔한 결론이 난다.
“우오즈미 아키라는 가까운 곳에 있는 절실한 하나의 ‘왜’에 얽메어 십일년을 살아왔고, 결국은 더 많은 ‘왜’를 떠맡아버린 모양이다. 젊은이들이 걷는 길은 늘 그렇다. 살아 숨쉬는 인간에게 생기는 수수께끼는 답이 하나뿐인 책상 위의 수수께끼가 아니기 때문이다.”
앞서 밝혔든시 이 책은 복싱과 비슷한 전개를 가진다. 사와자키는 온 몸으로 부딪혀 증거를 수집하고 독자는 멍 하니 지켜 볼 뿐이다. 그러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사와자키가 뻗는 펀치에 몸을 내맡길 수밖에 없다. 중요한 반전 포인트 몇 곳 뿐이지만 그 펀치의 강도가 상당하다. 가장 먼저 맞은 스트레이트는 아키라에게 사와자키가 묻는 장면이었다.
자네가 십일년 동안 하루도 잊을 수 없었던 ‘그 어떤일’, 그리고 지금 우리 관심을 그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싶은 ‘그 어떤 일’ ....“승부조작 이야기를 가지고 온 사람은 ( )였어.” 우오즈미는 숨을 크게 헐떡이며 토할 것 같은 지 한 손으로 입을 누르고 사무실을 뛰쳐나갔다.
‘추리소설=반전’이 공식이긴 하지만 이 책은 예외다. 복싱에서 스트레이트는 멋진 열광의 대상이지만 진짜 재미는 경기의 과정인 것처럼 단서를 모으고 알리바이를 하나씩 파괴 하는 과정에서 흥미진진함을 선물한다.
하드보일드는 멋진 영웅탐정의 이야기가 아니다. 거칠면서 내면은 따뜻한 탐정의 낭만을 공유하는 장르다. 한 낭만적인 탐정의 며칠을 함께 하는 것 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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